◈ 인수정(因樹亭)
감실마을 동쪽을 휘감아 마을 우측 초입에서 멈춘 야산끝자락에 터를 잡았
다. 규모는 정면 2칸, 측면 2칸의 방형(方形)정자로 좌측은 마루칸이고 우측은
온돌방 칸반, 툇마루 반칸을 앞뒤로 놓았으며, 전(?)좌측면에는 툇마루를 내밀
고 헌함을 돌렸다.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.
이 정자는 이 여빈(李汝馪)이 1600년경 (광해초)에 건립하였다 하니 현
재의 건물은 그후 수차례 중 중건을 거치면서 조선후기 양식을 보이고 있다.
이 여빈(李汝馪)(1556˜1631)의 본관은 우계(羽溪)이며 호는 취사(炊沙)이다.
선조 28년(1605)에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고 광해 2년 (1610)성균관전적으로
승진되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없어 전은소를 지어
올리고 궐문 밖에서 복합한지 3일이 지났으나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하여 곧
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. 학덕이 높
고 유집이 있어 눌은 이 광정이 행장을 찬하고 갈원 김 희주가 찬갈했다.
인조 1631(辛未)년 3월 28일에 졸하니 수76세이다. 사림(士林)에서 도계서원
에 배향하였는데 그 상향문에 힘은 무너져가는 기강을 붙잡을 수 있고 손으로
달리는 번개를 잡을 수 있다. 사나운 범이 관문을 지키니 뜻을 이루지 못했으
나 의로운 행동은 일성과 같도다. 당호인 인수(因樹)란 나무에 기대어 집
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숨어산다는 뜻도 있다.